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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공파 신재공문중

 

신재공 행장

공의이름은 달주(達周) 자는 딜보(達甫 호는 신재(新齋)로 시조 경평공(景平公)의15대손이고 파조 충경(忠敬)호괴정(槐亭)의9대손으로 숙종 병인 1686년에 출생하여 3세에 천붕(天崩)=(부친상)을 당하여 부친에게 효를행하시지 못함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며 유년기부터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도를 하며 때로는 노래자의희와같이 어머니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어머니를 즐겁게 하였다.

 

학문은 김용암(金용岩) 거유로부터 수업하고 교유(交遊)는 이도암(李陶庵)과 계탁(契託) 그연원은 실로 말할수없이 가상하고 이익장(李翼張)의 근칙(謹勅)과 최도중(崔道中)의 온인이 모두 공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부안의 선비들이 이로인하여 학풍을 가추게 되었고 매년 향공(鄕貢)이 당하면 공을 수위(首位)로 삼았다

 

공은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으셔서 전라도 유림회에서 두 번이나 전천(全薦)=(각도의 유림에서 훌륭한 선비를 천거하면 조정공의로 급제한것보다 더우대하여 벼슬을 주는제도)하였는데 그때 박판서 태항(朴判書 泰恒)이 전라도백으로 특히 공을 천거하면서 천사(薦辭)에 이르기를 도덕높은 숨은선비로 순박하고 바른것만 지키시는 호남의 거유이시다 하였으니 이 제사(題辭)만 보더라도 태산같은 덕망을 감추시고 시종 조정공의에 알리지못하게 하여 벼슬을 사양하시고 오직 어머니봉양과 섬기시는 일 만하셨다

 

이렇게 과거에 뜻이 없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작고하신후로 눈이 어두어저서 흑백을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말씀하시기를 네가등과하면 내눈이 밝아질것같다 하시어  어머니 뜻을 받들어 병오년 별과 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니 그소식을 들으신 어머니의 눈이 홀연이 밝아저 시권을 보셨고 익년 정미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자 평상시같이 눈이 밝아저 효강(孝杠)=(효자집이라는 표지로 나라에서 내려준 기)을보시고 단청이 불미(不美)하니더 채색하라하시니 듣는사람이 모두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극한 효자이시다 어머니 눈을 밝아지게 한 것은 어찌 효성의 극치가 아니며 신명의 감응이 아나랴 온 나라의 경사라 하였다

 

공은 명예도 탐하시지 않고 오직 어머니 섬김과 학문에만 정진하여 사서 육경을 탐독 문의가 통달하시어 유림간에 명성이 높았고 만년에 흥학의 뜻으호 김수종(金守鐘) 김손(金遜) 이만종(李萬鐘)등 11인 진사들과 더부러 사마재(司馬齋)라는 모임을 창설하여 훈도의 책임을지셨다..

 

공은 초라한 정사(亭舍)를지어 신재(新齋)라 편액을 걸었으니 모든일이 날로 새로워 지라는 뜻으로 그곳에 거처하시면서 경전을 탐구하셨고 영조 병자1756년 5월 14일 향년 71세로서거하시니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 마고동 사좌원(扶安郡 舟山面 所山里 麻姑洞 巳座原)에 장사하였다

그로부터 50년후 순조 병인년에 통훈대부 호조좌랑(通訓大夫 戶曹佐郞)에 증직되어 부안옹정사(扶安甕井祠)에 배향하였다 공은 오남일녀를 두셨다

 

공의 실행과 유고가 전현에이어 후학에 교화가 될만한 글이 서가에 가득하여 시림(士林)에서 출간하기로 논의 하였는데 불행히 화재로 소실되어 후손들의 슬픔뿐아니라 원근 사림들도 통탄하였다 공께서 생거하시던 지명을 스승이 사시는곳이라 하여 스승부자 부곡(傅谷)이라 명명(命名)하어 우리말로는 부골이라 불리며 후손이 근래까지 자가일촌 하여 120여세대가 살았는데 현제는 모두 전국에 산재하여 부골에 10세대도 못되게 살고있고 공이살던 집이나 정사도 흔적을 찾을수가 없어 공이 부골에 사셨다는 흔적마저 잃을까 두려워 공의 9대손 형석과 8대손 규엽 그리고 9대종손 대원등이 추진위원장 수석부위원장 총무등의 직책을 맡어 이곳에 유허비건립을 추진하여 후손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2004년 11월 6일에 부안군주산면 동정리 부골247번지에 유허비를 건립하여 보존되고 있다

 

한편 9대손 오석(五錫)이 후손들이 산재하여 뿌리마저 잃고 상호간 생면부지로 살게됨을 안타깝게 여겨 자손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승조돈문정신을 함양하여 공의 향사배향과 유허비참배 및 보전을 기하고저 2004년 2월 28일에 신재공문중 재경화수회를 결성하여 매년향사에 버스를대절하고 음식을 마련하여 공의 향사봉사(享祀奉祀)와 유허비 참배행사를 시행함은 물논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영원이 충당할수있도록 화수회 재산을 조성하여 거기에서 발생되는 수입으로 화수회를 운영하고 또 부골채씨근원 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총생에게 배포하였다.

 

신재공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