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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공파(少監公派) 응교공(應敎公) 행장(行狀)

 

13세 휘(諱) 경선(慶先)은, 평강채씨 6세 소감공파조 (少監公派祖) 휘(諱) 양생(陽生)의 현손(玄孫)인 주부공(主簿公) 휘(諱) 자침(子沉)의 증손(曾孫)으로 조부는 호군공(護軍公) 휘 중경(仲卿)이고, 부는 집의공(執義公) 휘 난종(蘭宗)이며, 어머니는 유돈(兪燉)의 따님이고  넷째아들로서 명종 14년(1559) 기미(己未)년 5월 21일 태어나셨다. 자(字)는 자장(子長), 호(號)는 죽촌(竹村)이다. 선조 21년(1588) 식년 진사(式年進士)에 입격(入格)하고, 선조 34년(1601년) 식년시(式年試) 문과병과(文科丙科)에 급제하여 강서현령(江西縣令)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용만〔龍灣:평안도 의주(義州)〕으로 국왕을 호위하고 그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등재되어있다.

 

선조 39년(1606년) 병오(丙午)년 이조좌랑(吏曹左郞)으로서 《명종실록》 편찬시 편수관을 맡았으며, 선조조(宣祖朝)에는 호조·이조좌랑(戶曹·吏曹佐郞),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통예원 찬의(通禮院贊儀), 홍문관 교리(弘文館郊理),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이조정랑(吏曹正郞), 평안도 수검어사(搜檢御使)등의 여러 요직을 거쳐 삼사전랑 행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춘추관편수관(三司銓郞行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지내고, 광해군 2년(1610) 경술(庚戌)년 5월18일에 황해도 어사(黃海道 御史)를 명(命)받아 이를 수행(遂行)하시고 병이 깊어 동년 9월24일 졸(卒)하였고. 사후(死後)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죽촌공(竹村公)은 문흥군철권(文興君鐵券)의 문장을 지었으며, 글씨는 한호(韓濩=韓石峯)가 썼다. 철권은 원래 포(布)에 쓴 것을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배(配)는 증정부인 여흥민씨(贈貞夫人驪興閔氏)로 민여건(閔汝健)의 따님이시다. 용사의 난(龍蛇之亂=壬辰倭亂)때 죽촌공(竹村公)이 강서현령(江西縣令) 재임 중 발생하였음에, 이때 公은 호가용만(扈駕龍灣)하였으며 부인(配)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피난 중에 시어머니에게 나물을 캐어 바치어 공경하는 마음이 극진하였음에 진실한 효부이었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산7-1(京畿道南陽州市水石洞山)이고,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2013년(癸巳) 봄에 후손(後孫)들의 뜻을 모아 제종합의(諸宗合議)를 거쳐 선영계하(先塋階下)에 사적비(史蹟碑)를 수립(竪立)하였다.

 

죽촌공(竹村公)의 장손(長孫) 호주공 유후(湖洲公 裕後)의, 호주집 권지6(湖洲集卷之六) 묘표(墓表)에는 선조고 홍문관응교부군 비음기(先祖考弘文館應敎府君碑陰記)에서 다음과 같이 표기하며 슬퍼하였다.

嗚呼! 公享年僅五十二。位不滿德。或局于時。

壽不符仁。實係之天耶。慟矣慟矣。

“슬프다! 공의 향년이 겨우 52세이다.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았으니, 혹 시간에 국한(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함) 되어서이며, 수명이 어진 것에 부합되지 않았으니 실은 천명에 관계 된 것인가?  애통하고 애통하다.”

후일, 번암상공(樊岩相公) 제공(濟恭)이 청(淸)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용만(龍灣:의주)을 지나면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한 선조행궁(宣祖行宮)을 용만(龍灣)의 흙토방 갈대발 진진중(塵陣中)에서 호종(扈從), 위수(衛戍)하신 용만장사(龍灣壯士) 6대조 죽촌공(竹村公)의 활약상을 상기하며 시(詩)로서 함인록(含忍錄) 연행시(燕行詩)편에 남겼는데 아래와 같다.

龍灣曲(용만 곡)       용만 노래

宣祖行宮二百年      선조대왕의 행궁이 이백년 동안  

土堦蘆箔尙依然      흙 계단 갈대발은 아직 그대로인데

軍民泣說如天德      하늘의 덕과 같다고 군민이 울면서 말하며

春日閒耕無稅田      봄날 한가로이 세금 없는 밭을 갈고 있네

또한, 함인록(含忍錄) 연행시(燕行詩)편 용만곡(龍灣曲) 기2(其2)에 번암상공(樊岩相公)은 죽촌공(竹村公)이 선조(宣祖) 때, 치적공로에 비해 낮은 벼슬로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힘을 개탄하여 시(詩) 한수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龍灣壯士悲解歌      용만의 장사는 슬픈 노래를 알아듣는데

生不成名奈若何      살아서 이름 이루지 못한 것을 어찌하리

十年騎撥鬢如雪      십년 역참생활에 귀밑머리 하얗게 세었는데  

纔得窮邊僉使窠      겨우 궁벽한 변방에서 첨사(僉使)자리 하나 얻으셨네

만력(萬曆)32년(1604,선조37) 10월 일.  채경선(蔡慶先)지음, 한호(韓濩) 씀.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산7-1 소재)

< 平康 13世 應敎公 諱 慶先 墓所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산7-1 소재)

< 平康 13世 應敎公 諱 慶先 史蹟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