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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공파 신재공문중

소감공파 충헌공종중

소감공파 첨정공 대야광법동종중

판서공파 현풍문중

소감공파호군공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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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공파 충헌공종중(少監公派 忠憲公 宗中)

 

충헌공의 행장(忠憲公 의 行狀)

충헌공(忠憲公)의 이름은 성구(聖龜)요 자는 용구(用九)며 호는 지비재(知非齋)로 시조 경평공(景平公)의 십오대 손이시고 파조 소감공(少監公) 양생(陽生)의 십대직손(十代直孫)이시며 순당공 진형(震亨)의 장자로 을사년(1605) 10월 18일 생이시다. 순정 경오년 (1630)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르렀다. 인조 병자년 (1636) 봄에 수창(首唱) 척화소(斥和蔬)를 올리니 충군애국지정(忠君愛國之情)이 맥맥히 흐르고 문장아 유려하고 당대에 지극한 효자(孝子)로 유명하다. 익년 봄 정월에 강화(江華)가 실함되어 김상용 등이 자분(自焚)하여 죽고 왕이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황복하고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볼모로 청국에 구금되었다가 종래 죽음을 당하니 공이 의롭지못한 세상에서 홀로 살리요 하고 상소를 올려 강화(講和)의 부끄러움을 엄이 배척하시라고 하였으니 왕이 보시고 비답하기를 이 소는 조지(朝紙)에 실치 말라는 하교기 있어 세상에 알리지 않했으므로 대화(大禍)를 면하였고 다만 사분시(寫憤詩)만 남았으니 세인이 모두 전송(傳誦)하였다 인조 무인년 (1638)에 형조(刑曹) 예조(禮曹)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거처 경진년 (1640) 정언(正言)에 오르고 다시 경상도사(慶尙都事) 신사년 (1641)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당시에 정음 김상헌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을 때 공이 정신론구(挺身論救)한 탓으로 파판당한일이 있었고 임오년 (1642)에 함경도사(咸鏡都事) 계미년 (1643)에 영월군수(寧越郡守)에 임하였다.갑신년 (1644)에 명견(明京)이 함락되고 9월에 청(淸)이 북경(北京)에 도읍을 정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망대곡하고 해수귀전(解綬歸田)하였다. 을사년 (1645) 12월 18일 향년 41세로 졸하셨디.  영조34년무인년 (1758)에 증 부제학(贈 副提學)하고 이어 상명(上命)으로 제사분시(題寫憤詩)하여 벽상에 걸린 시는 덥지말것이며 후손을 계속 녹용(錄用)토록 명(命)하였다. 순조16년 병자년 (1816)에 치유지전(致侑之典)을 내리고 고종8년 신미년 (1871)에 충절(忠節)이 탁이하므로 초증(超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경연의금부사(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官成均館事)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하고 시(諡) 충헌공(忠憲公)하다.고종13년 병자년 (1876)에 또 치유지전(致侑之典)이 내렸다.

 

배(配)는 증 정부인(贈 貞夫人)동래정씨(東萊鄭氏)요 묘는 과천 막계리 선영하에 합폄이나 서울 대공원조성으로 포천 적두리 종산으로 전묘하였으며 판서 김익용이 찬(撰)한 신도비(神道碑)가 포천 묘지에 현존하여 있다.아들은 석하(錫夏) 정하(呈夏) 형제이나 정하는 탈필공(奪筆公)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출계(出系)하였고 딸은 남용익. 이유한. 최진희다

 

충헌공 묘역

 

충헌공 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