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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공파 호주공문중 少監公派 湖洲公 宗中)
호조공의행장(湖洲公의 行狀)
중시조 평강 15세 휘(諱) 유후(裕後)는, 자(字)는 백창(伯昌), 호(號)는 호주(湖洲), 문혜(文惠)는 시호(諡號)이다. 고조(高祖) 휘 중경(仲卿)은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 증조(曾祖) 휘 난종(蘭宗)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조(祖) 휘 경선(慶先)은 삼사전랑 행 홍문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세자시강원보덕 선무원종 호성원종 양공신(三司銓郞行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世子侍講院報德宣武原從扈聖原從兩功臣)이다. 고(考)는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애려공(愛廬公) 충연(忠衍)인데 현령(縣令) 안사열(安士說)따님에게 장가들어 장자(長子)로서 선조 32年(1599) 기해(己亥)년에 출생하여 광해 7년(1615) 을묘(乙卯-161)에 17세로 생원시(生員試)에 2등으로 입격하여, 23세로 광해 13년(1621) 신유(辛酉)년 별시(別試)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인조반정 후(仁祖反正後) 계해(癸亥-1623)년에 개시(改試) 문과갑과(文科甲科)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禮曺佐郞兼春秋館記注官)을 거쳐 수의암행어사(繡衣暗行御史)로 영남(嶺南)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 인조 4년(1626) 윤 6월에 통진 현감(通津縣監-김포시 통진면)으로 부임하였으나 다음해 8월에 모친(母親)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예조 정랑(禮曺正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인조 7년(1629)에 옥당(玉堂-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여 호당(湖堂-독서당)에 선임(先任)되니 문망(文望)이 높았다. 다음해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과 홍문관 교리(弘文館郊理)를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조좌랑 겸 성균관직강(吏曹佐正郞 兼 成均館直講), 이조정랑(吏曹正郞), 부응교(副應敎)를 지내시고, 인조 11년(1633) 6월에 종 3품의 문관 품계로 중직대부(中直大夫)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춘추관(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외직으로 성산 부사(星山府使-경북 성주)를 지내다 다음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다가 사간원 응교(司諫院應敎). 보덕(輔德)과 의주수괄어사(義州搜括御史)에서 의정부사인 겸 춘추관편수관(議政府舍人兼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王이 숭례문(崇禮門)으로 거동(擧動)하심에 公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서 원수(元帥)와 두류자(逗遛者)를 참(斬)하라 장계(狀啓)를 청(請)하고, 체부종사관(體府從事官)으로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가(扈駕)하여 척화(斥和)를 의논(議論)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이 불모로 청(淸)나라 가게 됨에 궁관(宮官)이 되어 호위(護衛)하였으며, 다시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심양(瀋陽)에 가서 밤에 제궁관(諸宮官)과 술을 마시고 애강남부서(哀江南賦序) 시(詩)를 읇고 서로 손을 잡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하였음에 이 일을 청인(淸人)이 알게 되어 청(淸)나라를 배척하는 관원으로 지목되어 청국(淸國)의 압력(壓力)으로 인하여 강서(江西-황해도 금천)로 유배(流配)되었다가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인조 19년(仁祖-1641)에 예조 참의(禮曺叅議)를 지내고 외직으로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냈으며 인조 22년(1644)에 다시 예조 참의(禮曺叅議), 다음해 전주 부윤(全州府尹), 다음해에 사간원(司諫院)의 수장(首長)인 대사간(大司諫)과 병조 참의(兵曺叅議),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고 부제학(副提學),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이조 참의(吏曹叅議)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고, 효종 3年(1652) 임진(壬辰)년 4월에 승지(承旨)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차하여 문형(文衡-大提學)이 되였다. 계사년(癸巳年-1653)에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찬(撰)하고 경자년(庚子年-1660)에 효종실록(孝宗實錄)을 찬(撰)하니 인조(仁祖)께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은 적신(賊臣)의 무필(誣筆)이 많다하여 公을 명(命)하여 찬별사(撰別史)로서 잘못된 곳을 바로 하라하니 3朝(三朝-仁祖ㆍ孝宗ㆍ顯宗)의 금궤지문(金櫃之文)이 모두 다 公의 손에서 나왔다. 그 후 이ㆍ예ㆍ형ㆍ공(吏禮刑工)의 참의 참판(叅議叅判)과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도승지(都承旨). 한성부좌·우윤(漢城府左·右尹)을 거처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의정부우참찬 겸 세자좌빈객 경연(議政府右叅贊兼世子左賓客經筵), 춘추관(春秋館), 성균관(成均館), 중추부(中樞府), 돈령부(敦寧府), 의금부(義禁府)의 지사(知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과 내의원 봉상시(內醫院奉常寺)와 홍문관ㆍ예문관 양관대제학(弘文館藝文館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외직(外職)으로는 인조 20년(1642) 1월에 남원부사(南原府使), 전주 부윤(全州府尹)등을 지낼 때 형(形)을 행함에 장(杖)을 이용하지 않았으며, 사형수(死刑囚)를 놓아주었다가 기한 안에 스스로 오게 하였음에 읍민들은 지금도 칭송하며 청백애민비(淸白愛民碑)가 있다고 기록에 있으나 도시개발로 소실되었다. 현종 원년(顯宗元年-1660) 경자(庚子)년에 향년 62세로 졸(卒)하니 인조 22년(仁祖-1644) 심기원(沈奇元)의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적으로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였으며 문혜(文惠)로 증시(贈諡)되었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205번지에 석물 및 신도비가 마련되고, 내질(內姪)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영돈녕 부사(議政府右議政領敦寧府事) 윤지완(尹趾完)이 “公은 나에게 고모부(姑母夫)가 된다. 어려서부터 公이 길러주고 가르쳐준 것에 힘입어 이렇게 성장하게 되었으니, 公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公도 아들처럼 여긴다. 부모님을 모시면서 혼정신성하는 여가에는 公의 좌우를 떠난 적이 없으니, 公의 평소 언행 중에 본받을 만하고 전할 만한 것이라면 어떠한 것인들 모르겠는가. 公의 기상(氣像)을 논하자면 훌륭한 옥(玉)처럼 따뜻하고 상서로운 별처럼 찬란하다. 그것이 실천한 일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있어야 할 것은 모두 있고 없어야 할 것은 모두 없었다. 이것이 어찌 일가 자제가 개인적으로 찬양하는 말이겠는가” 하며, 일가자제찬양지사언여명 왈(一家子弟讚揚之私言歟銘曰)을 지었고, 그 한소절에 “세상일 버리고 신선으로 돌아가니 부의와 증직은 예에 맞게 하였네 곤륜산처럼 크고 옥돌처럼 수려한 양주고을의 무덤이로세” 하였다. 전부인은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따님 이고, 부인은 참의(叅議) 윤민헌(尹民獻) 따님이다.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으며 자식이 없어 동생 현감(縣監) 진후(振後)의 장남 시구(時龜)를 계자로 삼았는데 장성부사(長城府使)에 이르렀다. 2016년 가을 제종합의(諸宗合議)로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산51-1로 천묘(遷墓)하고 신도비(神道碑) 및 숭덕비(崇德碑)와 함께 조그만 재실(齋室)을 갖추었다. 公은 고(考)의 도의지교(道義志交)인 복천 강학년(復泉姜鶴年)의 문하생이었으며, 지은 시문(詩文)이 많이 흩어지고 약간의 권(卷)이 발간되여 세상에 전(傳)하며, 그 시예(詩藝)가 절묘(絶妙)하여 취(醉)한 뒤 읊은 시(詩)는 신선(神仙)같다 하였다. 숙종 31년(肅宗-1705) 을유(乙酉)년에 호주집(湖洲集)을 발간(發刊)하여 규장각(奎章閣)에 보존(保存) 중이다. 영조 49년(英祖-1773) 계사(癸巳)년에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崗-조선중기의 문신)의 문집 월헌집(月軒集)을 영조(英祖)에게 올리니 호주집(湖洲集)을 보신 것을 기억하시며 찬사(讚辭)의 글에 “석견호주집 금하문차편(昔見湖洲集 今何聞此編-옛날 호주의 문집을 보았는데, 오늘 어찌하여 또, 이러한 책을 들려주는가) 이라고 남기었으며, 또한,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 호주공(湖洲公)의 종현손(從玄孫)인 번암공 제공(樊巖公濟恭)에게 하사(下賜)한 시편중(詩篇中)에 “호주이후모해재(湖洲以後模楷在-호주 이후로 모범이 그대로 남았거니와)”라는 구절(句節)이 있으니, 평강채씨(平康蔡氏) 문중(門中)에서 선세(先世) 문벌(門閥)의 융성(隆盛)함이 公으로부터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 구재리(忠南靑陽郡化城面九在里) 147번지(화성중학교 뒤)에 상의사(尙義祠)를 1995年에 준공(竣工)하여 조두(俎豆)의 예(禮)로 公의 종손 희암공 팽윤(從孫希菴公彭胤)과 종현손 번암공 제공(從玄孫樊巖公濟恭)의 신위(神位)와 영정(影幀)을 모시고 봉사(奉祀)하고 있다.
< 平康 15世 湖洲公 諱 裕後 墓所 >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산51-1 소재)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산51-1 소재)
< 平康 15世 湖洲公 諱 裕後 神道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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