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채씨(平康蔡氏) 문중(門中)을 빛나게 하신 분

{각파조(各 派祖)는 여기는 기재(記載)하지 않음}

 

2세 정(楨)은 고려조의 문신으로 경평공의 큰아들이다. 음보(蔭補=조상의 덕으로 벼슬에 오름)로 누진(累進)하여 원종 원년(元宗 元年)1260년 경신에 우부승선 동4년(1263) 계해년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어사대부(御使大夫) 동6년(1265) 을축년에 상서도성 좌복야(尙書都省 左僕耶) 동10년(1269) 기사년에 원종이몽고에 행차할 때 호종(扈從=수행원)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고 동11년(1270) 경오년에 강도(江都=강화도)의 유수 재임중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강도를 빠저나와 조정에 보고하여 원종이 사전대처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고 난을 평정한후 금자광록대부 삼사태보 중서시랑평장사 평강군(金紫光祿大夫 三師太保 中書侍郞平章事 平康君)에 이르렀고 동12년(1271) 신미년 8월 병진일에 졸 하시다. 시호는 정선(靖宣)이고 원종의 묘정에 배향(廟庭配享=공로있는 신하가 죽었을 때 종묘제사에 부제(祔祭)하는 일)하다. 묘는 선영계하 이고 군산 삼상사에 신위 배향 중이다.

*고려사 열전 권 15~102에 기록되어있다.

 

2세 화(華)는 고려조의 문신으로 시조 경평공의 둘째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원종조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시작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를 역임하고 졸 하시다. 시호는 문헌(文獻)이시고 묘는 선산계하이며 군산 삼상사에 신위 배향 중이다.

 

3세 인규(仁揆) 는 고려조의 문신으로 2세 정(楨)의 큰아들이다. 원종11년(1270) 경오년에 우승선(右丞宣)을 시작으로 충렬왕15년(1289) 기축년에 동지밀직사 삼중대광 참의중찬(同知密直司 三重大匡 僉議中贊)을 역임하고 동왕29년(1303)계묘년에 치사(致仕)후 졸하시다. 시호는 양정(良靖)이시다.

 

3세 인평(仁平)은 2세 정(靖)의 둘째아들로 고려 충렬왕 6년(1280) 경진년 12월에 삼사사(三司使)를 시작으로 밀직사 판도사 판사(密直司 版圖司 判事)를 거처 동왕 10년(1284) 갑신6월 정해일에 졸하셨다.

 

3세 모(謨)는 2세 화의 큰아들로서 고려 고종16년(1229)에 출생하여 원종5년(1264)에 원종을 호종(護從)한 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侯) 좌승지 지신사(左承旨 知申事)를 거쳐 삼별초의 난 때 호남에 출정하여 진압한 공으로 광록어사대부(光祿御史大夫)에 오르고 그후 원종11년(1270)에 국왕과 세자를 호종한 공으로 광정대부 도첨의 참리전법전리 판삼사사 상장군(匡靖大夫 都僉議 參理典法典理 判三司事 上將軍)을 거쳐 첨의시랑 찬성사 판군부사사 중서시랑평장사(僉議侍郞 贊成事 判軍簿司事 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시고 충렬왕 28년(1302) 임인년 8월삭 임술일에 졸하셨으니 향년74다. 시호는 관신(寬愼)으로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 향림에 봉묘하고있다.

 

3세 함(諴)은 2세 화(華)의 둘째아들로 고려 원종조에서 좌우위 보승랑장(左右衛 保勝郞將)을거처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를 역임하셨다.

 

4세 귀수(龜壽)는 3세 인평(仁平)의 다섯째 아들로 고려 충렬왕조 증 삼중대광 문하찬성사 판예의사사 상호군 행 봉순대부 검교감문위 상호군( 贈 三重大匡 門下贊成事 判禮儀司事 上護軍 行 奉順大夫 檢校監門衛 上護軍)을 역임하셨다.

 

4세 종린(宗璘)은 3세모(謨)의 큰아들로 고려 충렬왕 32년(1306)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처 첨의정승(僉議政丞) 을 역임하셨다.

 

4세 종서(宗瑞)는 3세 모(模)의 둘째아들로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 광주목사(廣州牧使) 첨의정당문학(僉議政堂文學) 밀직사 판도사 판사 상호군(密直司 版圖司 判事 上護軍)을 역임하셨다. 묘소는 실전(失傳)되어 1926년 전북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불로산(쟁가리)에 같이 묘소가 실전된 그분의 큰아들 문필(文弼) 과 손자 수(琇)등 세분의 설단비(設壇碑)를 설치하고 또 1978년에 설단비 앞에 삼현사(三顯祠)를 건립하여 위세분의 위(位)를 배향(配享)하고 매년 음력 3월 20일에 세향(歲享)을 지내고 있다.

 

5세 승희(承禧) 는 4세 귀수(龜壽)의 독자로 고려말 추충익 대좌명공신 삼중대광 삼사사 겸 판전의사 상호군(推忠翊 戴佐命功臣  三重大匡 三司事 兼判典議事 上護軍)을 역임하셨다.

 

5세 문소(文紹)는 4세 종린의 셋째아들로 고려말기 전법사 판서(典法司 判書)를 역임하였다.

 

5세 하중(河中)은 4세 홍철(洪哲)의 큰아들로 고려27대 충숙왕, 28대충혜왕, 29대충목왕등 3대에 걸쳐 계속정승에 재임하였는바 충혜왕조에서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 )에 녹훈되고 공민왕때 우정승 영도첨의사사 판참사사 평강부원군(右政丞 領都僉議司事 判三司事 平康府院君)에 봉작되었다. 두동생(하생. 하로)이 모두장상(將相)에 올랐고 친몽고 정치가(親蒙古 政治家)로 기록되어있다.(부원군☞정1품공신에게 주어진 작호)

 

5세 하생(河生)은 4세 홍철(洪哲)의 둘째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중서시랑 평장사 판종부 사사(中書侍郞 平章事 判宗溥 寺事)를 역임 하셨다.

 

5세 하로(河老)는 4세 홍철(洪哲)의 셋째아들로 고려 공민왕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하셨다.

 

6세 수(琇) 는 5세 문필의 독자로 고려말 좌우위 보승 중랑장(左右衛 保勝 中郞將)을 역임 하셨는바 고려가 망한 후 고도(古都) 개성을 지나다가 맥수가(麥穗歌)를 지어 망국의 한을 읊었는데 그시(詩)가 현재까지 세전(世傳)하고 있으니

맥수가(麥穗歌

추풍필아송산로(秋風匹馬松山路)추풍에 필마로 송악가는길에

방고유인안미개(訪古幽人眼未開)고도를찾는 은자의 눈 편하지를못해

유수지금명간곡(流水至今鳴澗谷)흐르는물은 지금도 골작에서 울고

부운의구쇄봉만(浮雲依舊鎖峰巒)뜬구름은 예전처럼 봉우리를 감도네

천년성곽사양외(千年城廓斜陽外)천년의성곽은 지는해의 빆에있고

백대의관효몽간(百代衣冠曉夢間)백대의관은 새벽 꿈사이에 있도다

당세번화하처재(當世繁華何處在)당세의 번화함은 어느곳에 있는고

전대무주야화반(殿臺無主野花班)궁전과 누대엔 주인없이 꽃만피어있네

*맥수가는 조선숙종때 남용익(南龍翼)의 시집에 수록되어있다.

 

6세 연(淵)은 5세 승희(承禧)의 독자로 고려말 판첨의부사(判僉議府事)를 역임 하셨다.

 

6세 상(相)은 5세문무의 독자로 고려말 문림랑 사재동정(文林郞 司宰同正)을 역임하셨다.

 

6세 왕진(王儘)은 5세 하중(河中)의 큰 아들로 고려말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역임하셨다.

 

6세 인검(仁儉)은 5세 하생(河生)의 독자로 조선조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 하셨다.

 

6세 우상(遇祥)은 5세 하로(河老)의 독자로 조선조 초에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역임 하셨다.

 

7세 왕택(王澤)은 6세 양생(陽生)의 독자로 고려 공양왕때 신호위 보승호군상장군(神虎衛 保勝護軍上將軍) ☉{족보에는 중분시위사 영호군(中賁侍衛司 領護軍)으로 기록 되어있음} 으로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두문동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거하다가 이태조에게 몰살당하여 순국한 두문동 72현(杜門洞 72賢)의 한분이시다. 두문동으로 들어갈 때  산마루 고개 (현재의 불조현-不朝峴)에 조복(관복)을 벗어 걸어놓고 헌옷과 헌 갓으로 갈아입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조 정조때 왕명으로 표절사를 세워 배향(配享)하게하고 후세에 위국순절(爲國殉節)의 귀감으로삼았다.

 

11세 침(忱)은 10세 정평부사(定平府使) 석경(碩卿)의 독자로 호는 서강(西岡)이다. 중종5년 (1510)에 16세로 진사과급제하고 동11년(1516)에 식년 문과(式年文科)에급제한후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재임중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이어서 호당(湖當)에 선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광을 누리고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사헌부의수장).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을 역임하였다.(정선공파)

 

11세 세영(世英)은 10세 돈녕부첨정(敦寧府僉正) 자연(子涓)의 셋째아들로 호는 임진당(任眞堂)이고 별호는 탈필공(奪筆公) 이다(소감공.첨정)

중종5년(1510)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등 구폐개혁을 주장하던 신진 사림(士林)이 무고하게 화를 당하게 되자 이에 분개하고 하급관원이면서도 어전회의(御前會議≖국왕을 모신 중신회의)에 당당이 나가 영상 정광필. 우상 안당. 예관 남곤 등에게 이 사건의 원인을 캐어물었으나 묵묵부답하므로 가승지(假承旨≖임시로 임명한 승지)로부터 사필(史筆≖사관이 정당하게 회의사실을 기록하는 붓)을 빼앗아 들고 국왕앞에 나아가 소신은 간관(諫官≖사헌부 또는 사간원의 언관)이 아니므로 소임외의 일을 아뢰는 것은 벌을 받아 마땅하나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논죄하는지 그 죄명을 알고자 하나이다.����하고 아뢰니 좌우에 시립한 고관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 감이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어전회의는 파하였고 그 후 세영(世英)도 파직 당하였다. 그러나 대궐 안팎에서 그렇게 강직한 말을 한 것은 진군자(眞君子)가 아니면 감이 할 수 없고 채세영 한 사람만 할 수 있다하고 하며 어전회의에서 사필을 빼앗아 극간(極諫)한 선비라고 칭송하고 이후 탈필공(붓을빼앗은 관원)이라 별호를 불렀다.

그후 조정에서 다시 부르면 복직하고 불의를 보면 사임을 거듭하면서 명종원년(1546)에는 천추사(千秋使=중국 황태자 생일을 축하차 파견되는 사신)가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중국어에도 국내 제일의 통달 이였다) 명종3년(1548)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6조의 각 참판과 장예원 판결사. 한성부윤을. 외관직으로 경상, 경기, 충청도의 관찰사. 개성유수. 등을 두루거쳤고 자헌대부로 승진하여서는 한성부판윤, 세자좌우빈객. 공조. 호조판서. 의정부 좌 우참찬. 지경연사를 역임하였다.

재임중 기묘. 을사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으나 세영만은 창안백발(蒼顔白髮)로 조정신하에게 빛났으며 그 누구도 범하지 못 하였다고한다.

노후에 중추부의 한직으로 재임까지 무려9배명 (九拜命=아홉번 재임용됨)의 광영을 누렸고 추영삼세(追榮三世)의 영전(榮典)이 내려져 증조고 면천군수 효순은 이조참의에. 조고 사헌부 감찰 담은 이조참판에 선고 동녕부첨정 자연은 이조판서에 각각 증직되었다. 학문이 깊었고 천문. 의약. 중국어 에도 통달 하였다. 선조원년(1568) 1월2일 향년79세로 타계함에 국왕이 부음을 듣고 철조(撤朝=임시휴무)를 명하고 국왕이 친히 조문하였으니 실로 영광된 일로서 사후에도 가문을 빛냈다.

 

11세 홍국(弘國)은 판서공 파조 충경(忠敬)의 고손이고 10세 용양위 부사정 치의(治義)의 둘째아들로 호는 야수(野叟)이고 남당창의 의병장 (南塘倡義 義兵將)이다.

* 창의(倡義)=국난에 의병을 일으킴.

중종29년(1534) 부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조국에 충성하라는 부친의 독실한 교육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제봉(高霽峰) 김건재(金健齋)등의 창의격문을 보고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錦山) 전쟁터로 달려갔으나 고재봉등이 전멸한 후여서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부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서 세 아들과 집안장정 20여명. 종족33명 향리 친인척 59명과 더불어 부안남당(扶安南塘 )에서 창의혈맹(倡義血盟)하고 스스로 의병장(당시:의려장) 이 되었다. 그때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慄)이 극찬하였고 그 무렵 관군이나 의병진에 군량이 없어 곤란하므로 의병장 채홍국이 의주행재소 영남의 곽재우(郭再祐)진영에 군량을 보급하였고 이때 순천지방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진격 하던 중 명나라 지원군 장수인 송경략(宋經略)이 왜군과 화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 하던 중 순창 적성 강변에서 야영하면서 통분한 시를 지어 읊었으니 그 시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당시 관찰사 이광(李洸)이 전후사실을 징계로 고하니 선조께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使) 를 제수하였다. 정유재란(선조30년 1597)때에는 임진왜란때 창의한 동지들과 동맹 재편성함에 있어 동조 창의자가 더욱 많아졌다.

동년 3월 12일 왜군이 흥덕으로 처 들어와 출격해보니 영암 해남의병이 먼저 와서 격전하고 있어 연합하여 혼전 하였는바 이곳이 배풍령(排風嶺)이고 이 전투에서 의병장 채홍국 삼부자(홍국. 명달. 경달.)가 모두 장열하게 전사하였고 그 외 평강채씨 의병만도 홍조(弘祖=홍국의 친형) 우령(禹齡=5세로 현감) 상(상=홍국의 제종으로 성균관 생원) 삼의손자 德良, 忠良) 삼(蔘=홍국의 재종) 삼의 아들 대림(大臨)등이 모두 전사 하였다.

고종9년(1872) 국왕은 홍국을 병조판서에 증직하고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들을 동내에 정문을 세워 길이길이 표창함)를 명하였다.

선조 30년 3월 12일부터 동23일까지 격전한 이곳을 후세에서 호벌치(胡伐峙)라 칭하고 현재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비를 새우고 전북 지방기념물로 지정 문화재로 보존 하고 있다.

이 남당 창의 의병중 평강채씨는 33인 인바 그명단은 다음과 같다.

홍국 우령 홍조 명달 경달 대형 중달 상 대림 봉 영달 덕량 치원 구 대원 홍업 홍우 영달 영 삼 인달 곤 장 홍무 침 인달 홍서 홍주 치정 이달 성장 충량 등이다.

 

13세 희연(希淵)은 판서공 파조 충경(忠敬)의 6대손으로 생원 원상의 셋째 아들이며 호는 화암(和菴) 이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장군과 합류하여 웅치전(熊峙戰)에 참전하여 하상 백마를 타고 종횡무진 용전하여 백마장군으로 불리우고 이 전투에서 백마가 쓰러지자 도보로 격전중 전사하였다. 선조가 그 공적을 가상하고 선무원 종훈에 녹훈 하였다.

 

13세 희징(希澄)은 희연의 동생으로 원상의 다섯째 아들이며 선전관 해주 판관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부장 고득뢰(高得賚=희징의 장인이다) 와 같이 무주 거창 개녕에서 승전하고 진주에 입성하여 사수 하던 중 다음해 1593 왜군의 총공세로 인하여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부장 황진(黃進)등과 같이 격전중 모두 전사 하였다.

 

15세 우령(禹齡)은 전선공파 정평부사 안경(安敬)의 8대손이고 사옹원참봉 후침(後沈)의 둘째아들로 호는 향일재다. 진사에 급제하여 무안현감 재녕군수 이천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의 고경명(高敬命)장군 휘하에 들어가 분전하였으나 고장군이 패전하자 잔병을 인솔하고 부안 남당창의(의병장 채홍국)의 휘하에 합류하여 혈맹하고 집안장정 25인을 인솔 참전하여 흥덕 부안 무장 고부 고창등을 수호하였으며 순천지방의 위급함을 듣고 진격하던 중 석보진(石堡鎭)에서 명나라 원군장수 송경략(宋經略)이 왜군과 화의하였다는 소식을듣고 동지들과 통곡하며 회군하던 중 순창적성강병(赤城江邊)에서 야영하면서 분완시(憤樊詩=분하여 탄식하는 시) 를 읊어 탄식했다고 한다. 당시 도원수 권율 장군이 그 말을 듣고 극찬하였다고 하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에 다시 창의하여 채홍국 의병장과 같이 흥덕 장등원(長登原)전투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이어서 부안 호벌치(胡伐峙)전투에서 격전중 세궁역진(勢窮力盡)하여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그후 선조는 이 사실을 듣고 선무원종훈에 녹훈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였다.

 

15세 천송(千松)은 정선공파 정평부사 안경(安敬)의 8대손이고 주부 수구(壽구)의 독자로서 호는 금송(琴松)이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로 의병을 모집하여 10여명이 되었다. 도원수 권율 휘하에 들어가 참모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금산전투에서 용전분투하다 전사하였다. 권율 도원수의 장계로 장령(掌令)을 증직받고 선무원종원에 녹훈되었다. 광주(光州) 권율도원수의 유격비에는 아장(亞將)중 4번째로 기록되어있다.

 

15세 유후(裕後)는 14세 진사 충연(忠衍)의 큰아들로 호는 호주(湖州) 시호는 문혜공(諡號 文惠公)이다.(소감공 주부)

광해7년(1615) 17세에 생원과 급제하고 인조 원년(1623) 문과전시탁 일인(文科殿試擢 一人) 으로 장원급제(壯元及第=문과전시갑과에서 1등)하여 호당에 선임되어 사가독서의 영광을 누리고 경관직 외관직(京官職 外官職)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인조14년=1636)때에는 국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하고 청과의 화친을 극력 반대하였으며 세자(봉림대군=후에 효종)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압송될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으나 반청관(反淸官=청나라를배척 반대하는 관원)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력으로 강계(江界)에서 귀양살이도 하였다.

인조19년(1641) 광해군이 제주에서 죽자 예조참의가 되어 제주에 가서 호상을 맡아 보기도하였다.

세자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효종으로 즉위하자 당상관이 되어 인조실록 효종실록을 편찬하고 대제학(문관최고의 명예직)이 된 후에는 광해군 때 역신들이 잘못 기록한 선조. 인조. 실록을 보정 수찬(修撰) 한바있다.

그 후 육조의 참판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승정원 도승지 한성부 좌. 우윤을 거처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의정부 우참찬 세자 좌빈객 경연 춘추관 성균관 중추부 돈녕부 의금부의 지사와 오위도총부 도총관 내의원 봉상시의 제거등 정2품 요직을 모두 겸직 하였다.

현종원년(1660) 향년62세로 타계하였는바 인조22년 심기원(沈奇元)의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적으로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증직 되였으며 문혜공(文惠公)으로 증시(贈諡)되었다.

또한 선조 인조 효종등 3세의 금궤지문(金櫃之文)으로 파격적인 추영이 내려져 고조 용양위호군 중경은 예조참판겸 양관제학에  증조 사헌부집의 난종은 예조판서겸 양관대제학에 조고 홍문관응교 경선은 이조참판에 선고 진사 충연은 이조판서에 각각 증직되었다.

 

15세 진형(震亨)은 14세 정간의 아들로서 조선조의 학자로 유명하다. (소감공주부) 광해8년(1616)추에 별시가 있어 제우들의 강권으로 응과는 하였으나 책문대지 과제(策文大旨 科題)가 천인(天人)이라 하였기에 공은 허두에 < 명호라 당금지사를 상인언재아 천리멸의 요 인도절의 라 >(鳴乎라 當今之事를 尙忍言哉아 天理滅矣 요 人道絶矣  라) 갈파(喝破)하고 퇴장하였는데 그 화가 장차 공에게 파급 될 것을 우려한 상시관 연언군 이광정(李光廷)이 극력으로 주선하여 대화를 면하였다.

광해군14년(1622)에 호남인 나만기(羅萬紀)가 인목대비를 모해 하고자 팔도에 통문을 돌리니 그 내용이 흉장역도가 무소취비라 공이 이를 보고 즉석에서 이 통문을 파기하였다. 그 화가 공에게 미치게 될즈음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인조께서 환도 하실때 전의까지 호가하고 공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육과 영농에 힘쓰겠다는 뜻을 주청하고 진천으로 귀향하시니 인조께서 장차 공을 중용 하고자 하시던 차에 섭섭한 마음으로 환궁 하셨다.

진천 몽촌은  공께서 현몽(現夢)으로 득지(得地)한 택지였으며 마을에 상하 양소(上下兩沼)를 축조하고 박채(蒪菜)를 이식한 연유로 박당(蒪塘)이라 자호(自號)까지 하셨으며 상하쌍박소. 중간일초려「上下雙蒪沼 , 中間一草廬」라 음영하였다. 1785년 봄에 그의 입향지인 진천에 박당 채선생 유허비(蒪塘蔡先生遺墟碑)를 세웠다.

 

16세 성구(聖龜)는 15세진형의 아들로 선조38년(1605)생으로 인조8년(1630)에 26세의 약관으로 급제하여 영월군수(寧越郡守)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등을 역임하였다.(소감공 주부)

인조 14년(1636) 봄에 병자로란이 일어나자 척화 할것을 선두에서 주장하였고 이듬해 정축년(丁丑年)에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등 서구 삼학사(西拘三學士) 가 청국에 불모로 끌려가자 공은 의불독생(義不獨生)이라 하고 다시 상소를 올려 강화를 극력 배척하는 내용이 너무 격렬하여 임금이 이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비답하시기를 이 글이 문구마다 충절이 넘쳐흐르나 청인들이 알고 트집힐까 두려우니 조보(朝報)에는 게재하지 않도록 특히 유념하라 하였다.

인조 23년(1645)에 졸 하였으니 41세의 젊은 나이였다.

순조16년(1816) 12월10일에 부제학(副提學)으로 추증되었으며 다시 고종8년(1871)에 충절이 탁월하므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정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우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庭 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으로 재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忠憲公이다.

 

17세 이장(以章)은 16세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시흠(時欽)의 독자로 숙종2년(1676)에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수사 경상좌병사 금위천총 당상선전관 중화. 영흥. 강계. 김해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소감공 주부)

재임중 숙종비 민비(인현왕후) 의 폐비가 부당(장희빈의 무고) 함을 극간하다가 2차례에 걸쳐 귀양살이를 하였다. 민비가 복위되고 정국이 안정되어 내외관직을 재임 하는 동안 청렴관장(淸廉官長)으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사후 영조조때 그의손자정하(挺夏)가 무과에 급제하여 등용됨에 옛일을 회상하고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고종조(1879)에 충정공(忠貞公)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17세 팽윤(彭胤)은 16세 동지중추부사 시상의 넷째 아들로 호는 희암(希菴)이다.(소감공 주부) 숙종13년(1687)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동15년(1689)에 증광시문과 갑과(增廣試 文科 甲科)제3인(第3人=3等)으로 백형 명윤은 병과로 두 형제가 동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 재임중 호당에 선임되어 사가독서의 영광을 누렸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의 요직을 거쳤고 외관직으로 서천 남포(보령) 양양 무주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병조참판 예조참판 예문관 제학을 역임 하였다.

영조4년(1728) 이인좌의난 (밀풍군을 추대하며 반역 변란) 때에는 중형인 한성부좌윤 채성윤과 적진을 거쳐 국왕께 달려가 안위를 물으니 영조가 흐믓하여 여러차례 포상하기도 하였다. 공은 만1세때 글자를 판독하였고 4세 이후에는 놀라운 신동이 되어 이를 보고싶어 찾아온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며 글씨와 문장이 당대를 주름잡아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 중창비(頭輪山 大花寺 重創碑)와 대흥사 사적비(大興寺 寺蹟碑) 양산 통도사 세존비 비문과 지리산 화엄사 상량문(上樑文)등을 짓고 썼다한다. 영조 7년(1731) 4. 26에 졸하다.

 

18세 응지(膺智)는 17세 시양(時亮)의 장자로 제주도(당시는 탐라도)입향조이다.(소감공 주부)

당시 입향(入鄕) 사연은 기록이 없어 알수 없으나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제주에 갔다가 땅이 기름지고 바다와 산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온이 따뜻하여 그곳에 정착하고 자손이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사후의 묘소는 의외로 1978년 경기도 과천의 8대조 주부공 자침(子沈 )선영 경내에서 발견되어 후손이 제주도로 면봉하였다. 입향 사유를 알길없는 후손들의 유한(遺恨)이 이어지고

있으나 아마도 광해조(1609-1622)연대의 난세에 또 인조조의 이괄(李适)의 난 (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27)등 연이은 국난에 멀리 피난길에 오른후 그곳에 정착하지 않했나 추정된다. 아들은 언공(言恭)이고 손자는 덕원(德遠)인바 통정대부다.

후손들은 제주에 세거중이고 현재 서울등 전국각지에 다수 분포 되어있다.

 

19세 제공(濟恭)은 18세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의 독자로 호는 번암(樊岩)이고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소감공 주부)

조선왕조 500년중 영. 정조(英祖. 正祖)시대를 문예부흥기. 실학전성기. 탕평시대라고 하는데 그 이면에는 번암정승의 탁월한 정치역량과 탕평이념의 구현에 수반한 피나는 숨은 공이 있었기에 초당적 문민정치를 꽃 피웠을 것이다.

 

정조라는 불세출의 성왕(聖王)이 제위하면서 그 자신이 탁월한 문장가요 화가였기에 일찍부터 천재를 알아보았다. 그 밑에 제공은 10여년간 독상으로 재임하면서 조선조 3대 명상(名相)(즉 황희 상진 채제공)중의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현재까지도 국영 민영방송국 (특히 교육방송)에서 그 높은 치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영조10년(1734) 15세때 향시(생원 진사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동19(1743) 24세 때 탁별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호서(충청)암행어사 도승지 양사의 수장 경기 함경 평안도 관찰사 6조의 각 판서를 모두 거친 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영조34년(1758)에는 도승지가 되어 열성지장(列聖誌狀)을 증보편찬 하였고 역신들에 의한 폐 세자의 명이 내린 것을 제공이 한사 극간하여 이를 막아냈다.

영조38년(1762) 모친상으로 거상중(居喪中)인 때 사도세자의 비보를 듣고 상복을 입은채 입궁하여 10여일동안 통곡하였으며 만일 이때 제공이 도승지나 재상에 재직중이었다면 이런 당쟁의 제물이 되는 참사는 없었을것이라는게 당시 야사(野史)이기도하다.

영조52년(1776)에는 서응명과 같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고 이해에 영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國葬都監)으로 국장을 치루었다.

정조원년(1776)에는 정조가 등극(登極)하자 역신 홍계희 김상로 등이 국왕을 시해코자 심야 입궁하는 역변이 발생하자 제공이 수궁대장(守宮大將)에 임명되었다. (이때가 이판 형판 예판 병판 등을 겸직 중이다) 정조12년(1788) 우의정으로 승진할 때 에는 6대정책을 진언해서 그대로 시행 하였다.

정조14년(1790)부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제공은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하다가 반대정파의 모략으로 정조 16년(1792)좌의정을 일시 사임하고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전임 하였다.

 

다음해 정조17년(1793)영의정으로 승진 임명되고 정조23(1799) 1월 18일 향년 80세로 임종하자 정조대왕의 친제문(親祭文)으로 대신들이 장례를 치르게 하고 비석은 물론이고 생전의 공적을 찬양항 행장뢰문(行狀賚文)을 지어 친필로 써서 비석에 새겨 뢰문비(賚文碑〓왕이 직접내린 추모비에 해당)를 장례시에 새워 주었으니 이것은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 이었다. 제공의 임종소식을 들은 서울 관민 수천명이 상가에 몰려와 상중 3개월간 연일 호곡 하였고 3월26일 출상일에는 영남의 10여 서원에서 유생들이 장지에서 회의를 열고 사림장(士林葬)으로 장사를 지냈으니 이것도 조선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역북동 산 3,4,5번지로 경기도 기념물 제17호이고 뢰문비각(賚文碑閣)은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76호로 지정하여 보존 하고 있다.

배향사당은 상의사(尙義祠)로 충남 청양군 화성면 구재리에 있으며 충남유형문화재 제130호이며 전남 나주에있는 미천서원(眉泉書院) 충남 부여의  도강영당(渡江影堂)에 영정이 있으며  영국대영박물관에도 초상화가 있다.

추영4세의 영전이 내려져 고조고 화순현감  진후(振後)는 이조참판에 증조고 동지중추부사 시상(時祥)은 이조판서에  조고 한성부좌윤 성윤(成胤)은 의정부 좌찬성 양관대제학에 선고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은 의정부 영의정에 각각 증직 되었다.

 

19세 정하(廷夏)는 18세 응정(膺禎)의 셋째아들로 호는 우안재(遇安齎)다.(소감공 주부)

숙종46년(1720)에 출생하여 영조29년(1753)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出仕)하여 정조20년(1796)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재임중 기로소(耆老所=70세가 넘은 현직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여 놀도록 마련한 국영 경로당으로 이곳에 들어가면 전토와 노비가 하사되고 승문원과 성균관에서 7품이하 관원이 차출되어 수직관으로 근무하는 곳으로 기사(耆舍). 기소(耆所)라고도함)에 들어갔고 동24년(1800) 지중추부사 형조판서 겸 호조판서 오휘도총부 도총관 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순조3년(1803)에 향년84세로 졸하였다.

사후 추영의 은전으로 조고 봉장(鳳章)은 호조참판에 선고 응정(膺禎)은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 채씨 기로소입자 하신분은 세영. 제공 정하 홍리(世英 濟恭 廷夏 弘履)등이시다.

 

홍리(弘履)는 19세 의공(義恭)의 독자로 호는 기천(岐川)이다.

영조13년(1737)에 출생하여 동38년(1762)에 식년 진사과에 장원급제하고 동 42년(1766)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를 두루 거쳐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司憲府 大司憲 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형조판서 재임중 기로소에 들어갔고 치사(致仕)후 봉조하(奉朝賀=실제 정무는 보지 아니하고 국가의식이 있을 때는 관복을 입고 참여하며 종신토록 녹봉이 지급되는 특별 예우 직)의 특전관직을 받았으며 순조6년(1806)에 졸하셨다.

사후 추영의 은전으로 조고 응조(膺祖)는 이조참판에 선고 의공(義恭)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22세 동건(東建)은 21세 포도대장(좌포장) 학영(學永)의 독자로 순조29년(1829)무과에 급제하여 내외 문무관직을 역임하였는바 조선조 장신록(將臣錄)편의 장수(將帥)220인중 단 한사람의 채씨다.(소감공 주부)

철종13년(1862)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시작으로 고종3년(1866)에 개성부 안무사(開城府 按撫使)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삼도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전라 경상 충청등 삼도 수군 사령관) 지삼군부사(知三軍 府事=어영청 금위청 훈련도감)를 거처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손자 규상(奎常)도 경상 좌우 병마절도사를 거처 나주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추영3세의 은전으로 증조고 광하는 승정원 좌승지에 조고 운산군수 현구는 병조참판에 선고 좌포장 학영은 의정부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23세 광묵(光黙)은 14세 충원(忠元=경주부윤으로 평강채씨 족보창간자)의 9대손이고 22세 동식(東軾)의 큰 아들인바 호는 귀연(龜淵)이다 (소감공주부)

고종22년(1895)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박창노 안병찬과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당시 홍주(지금은 홍성)목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상경하여 수차 통분을 상소하였다. 그 기상을 가상하고 내주부사에 임명하였으나 부임을 거절하고 다시 귀향 하였다.

1906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박창노 안병찬 박안기 이만식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다음해 민중식의 휘하에 합류하여 홍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격전중에 아들 규대(奎大)와 함께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광복후 건국무공훈장이 추서되고 국가에서 절사(節祠)용 위토를 구입 보존하였다.

현재 충남 청양군 화성지서 광장에 공적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영찬(永贊)1854년(철종5년)~1908(융희2년)

일명 기문(基文) 으로 전북 순창출신 이다. 포수로 있다가  1905년(광무9년)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최익현(崔益鉉) 임병찬(林炳瓚)의 의병에 가담하여 대포장(大砲長)이 되었다.

순창에서 패전하자 임병찬의 명령으로 의병 명부를 소지하고 피함으로서 의병 1천여명의 체포를 면하게 하였고 그후 순창군의 창의장 김상기(金相璣)휘하에 들어가 경남 하동군 화개동에서 광양의장(光陽義將) 백낙구(白樂九)와 함께 순천을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이듬해에 풀려나와 다시 항일전을 전개하다가 석탄장수를 가장한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

 

응언(膺彦)은 평남 자산(慈山)출신으로 1907년 평원군(平原郡) 숙천(肅川)에서 의병을 이르켜 이진룡(李鎭龍)부대에 합류 부장(副將)이 되어 평안도 함경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 강두필(康斗弼)과 함께 의병을 인솔 안변 마전동 주재소(安邊馬轉洞駐在所) 황해도 선암(仙岩)헌병파견대등을 습격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후 강원도에 들어가 계속 항일투쟁을 하다가 1915년 평남 성천에서 왜군에게 잡혀 사형 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