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채씨(平康蔡氏)는 종래(從來) 9개 종파(宗派) 였는데 시조 경평공(景平公)의 장자 정선공(靖宣公) 후손들이 단일파(單一派)였는데 사실상 정선공(靖宣公)은 대종회에서 봉사(奉祀)하여 왔고 그 후손은 5개문중으로 분리되어 각기 선조들을 봉사(奉祀)할뿐 않이라 재정 이나 모든 문중 운영이 분리되어 각문중이 총의에 서 분파를 의결하고 2019년 11월 16일 대종회 운영위원회에서 분파를 승인 키로 의결하고 2021년 5월 7일 대종회 임시총회에서 추인하여 정선공(靖宣公) 후손파(後孫派)로는 5개 파이니 송계공파(松溪公派) 공조판서공파(工曺判書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서강공파(西岡公派) 금송공파(琴松公派)이고 문헌공(文獻公)의 후손은 8개 파로 중암공파(中菴公派) 돈녕공파(敦寧公派) 어사공파(御使公派) 고성군파(固城君派) 소감공파(少監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등 으로 13개 종파(宗派)로 각 파조는 다음과 같다.

 

 

 ★ 송계공파 파조(松溪公派 派祖)

 

◎ 송계공파(松溪公派) 파조(派祖) 6세문(文)은 고려 충열왕조에서 밀직사 판도사 판사(密直司 版圖司 判事)를 역임하신 3세 인평(仁平)의 증손이고 상호군(上護軍) 5세 수(守)의 장자로 호(號)는 송계(松溪)이고 중랑장 충의전 대제학(中郎將 忠義殿 大提學)을 역임 하시었다.

 

 

 ★ 공조판서공파 파조(工曹判書公派 派祖)

 

◎ 공조판서공파 파조(工曹判書公派 派祖_) 7세 극경(克敬)은 고려조 정순대부(正順大夫) 행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6세 연(淵)의 장자로 공민왕조의 기유방(己酉榜)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여 전서(典書)를 거처 이조 태조조에 공주목사(公州牧使) 로서 호종(扈從)의 공로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책록하고 록권(錄券)되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 겸 대제학(工曹判書 겸 大提學)을 역임하셨고 공의 독자 8세 거안(居安)은 봉직랑교도(奉直郎 敎導) 손자 9세 하정(河禎)은 사정오위(司正五位)이다.

 

 

 ★ 승지공파 파조(承旨公派 派祖)

 

◎ 승지공파(承旨公派) 파조(派祖) 10세 석(錫)은 생원(生員) 9세 거장(居長)의 장자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를 역임 하셨고 독자 한정(漢)은 양지현감(陽智縣監)이셨다.

 

 

 ★ 서강공파 파조(西岡公派 派祖)

 

◎ 서강공파(西岡公派) 파조(派祖) 11세 침(沈)은 이조참판(吏曹參判) 10세 석경(碩卿)의 독자로 초명은 순(恂)이고 자(字)는 중부(仲孚) 호(號)는 서강(西岡)이시며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이셨다 공은 연산(燕山)2년에 16세에 진사과(進士科)에 급제(及第)하고 중종(中宗)5년에 식년시 문과 을과(式年試 文科 乙科)에 급제 하여 중종 11년 홍문관(弘文館) 교리(校吏) 재임중 별시문과을과(別試文科乙科)에 급제한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외직으로 곤양군수(昆陽郡守)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사간(司諫)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시강관(侍講官)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을 거처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조참의(吏曹參議)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역임 하셨다 공은 평강채씨에서는 처음으로 호당(湖堂)에 선임되셨다.

 

 

 ★ 금송공파 파조(琴松公派 派祖)

 

◎ 금송공파 파조(琴松公派 派祖) 15세 천송(千松)은 주부(主簿) 14세 수구(壽耈)의 장자로 자(字)는 윤백(潤栢) 호(號)는 금송(琴松)으로 선조(宣祖)25년 임란이 발발하자 구국일념으로 백의(白衣)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여분투(奮鬪)하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 휘하에 들어가 많은 전공을 새웠으며 금산전투에서 용전분투(勇戰奮鬪)하다 전사하셨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장계(狀啓)로 장령(掌令)을 증직(贈職)받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광주 도원수권율(都元帥權慄) 유적비에서는 아장(亞將)중 제4위로 기록되어있다.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광을 누렸다.

 

 

 ★ 중암공파 파조 (中庵公派 派祖)

 

◎ 4세 홍철(洪哲)은 3세 함(諴)의 독자로 고려24대 원종(元宗) 3년(1262)에 출생하여 고려 충열왕때 문과급제(文科及第)하고 응선부록사 통례문지후(膺善府錄事 通禮門祗候)를 거처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있다가 사임하고 은거 14년간 불교의 철리(哲理)와 음악을 연구 하였다. 130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특별 초청하여 사의부정(司醫副正)이 되고 1311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전직지후(前職祗侯)를 연유로 여덟 번 승진하여 정승 지위(政丞 地位)에 올랐으며 1313년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도 다녀왔다. 1314년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지적경계(地籍境界) 전적(田籍) 세제(稅制)를 제정할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오도순방계정사(五道巡訪計定使)가 되었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승진하여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20년 충숙왕 7년에 중대광 평강군(重大匡 平康君)에 봉작되고 1332년 충숙왕 복위 1년에 찬성사가 되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순천군(順天郡)에 개봉(改封)되고 순성보익찬화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이 되었다. 문장과 기예(技藝)에 뛰어났고 불교경전(佛敎經典)에 밝았으며 국로(國老)8인을 맞아 기영회(耆英會)회 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자하동신곡(紫霞洞新曲)을 창작하였는바 현재도 고려악부(高麗樂府)에 전하여 오고 있다. 호는 중암(中菴)이고 군호는 순천군(順天君)이시며 고려28대 충혜왕(忠惠王) 복위 원년(1340)에 졸하시니 향년79세였으며 묘는 순천시 덕흥동에 있다.

*고려사열전 권21~108에 기록이 있다.

 

 

 돈녕공파 파조 (敦寧公派 派祖)

 

◎ 5세 문귀(文貴)는 4세 종린(宗璘=모의 큰아들)의 둘째아들로 고려 말기 돈녕부감 판서(敦寧府監 判書)를 역임 하셨다.

 

 

 ★ 어사공파 파조 (御使公派 派祖)

 

◎ 5세 문빈(文彬)은 4세 종린의 넷째 아들로 조선조 태종(朝鮮朝 太宗)때 돈녕부감(敦寧府監) 재임중 점마어사(點馬御使)가 되어 함흥 도련포(咸興 都連浦)로 말을 구하려 갔다가 구하지 못하자 장계(狀啓=임금에게 서면보고)로 이 사실을 고한바 태종이 크게 노하여 그곳 함흥에서 귀양살이하라는 왕명이 내려 그곳에서 귀양살이하면서 후손이 연면하여 함흥 보청(咸興 甫靑)에 세거 하고있다.

 

 

 ★ 고성군파 파조 (固城君派 派祖)

 

◎ 5세 문무(文懋)는 4세 종서(宗瑞의 둘째아들로서 고려 충선왕때 은광청록대부상서도성 좌복야 중서시랑 평장사 고성군(銀光靑祿大夫 尙書都省 左僕耶 中書侍郞平章事 固城君)에 봉작되었다.

 

 

 ★ 소감공파 파조(少監公派 派祖)

 

◎ 6세 양생(陽生)은 5세 문소(文紹=4세 종린의 셋째아들)의 독자로 고려 공양왕(恭讓王)조 군기감소감(軍器監少監)으로 재임중 고려가 망하자 개성을 떠나 예성강(禮成江)변에서 배를타고 정처없이 수십일을 남하하여 어느 포구에 하선했는데 그곳이 군산(群山)포구였고 그곳에서 가장 험준한곳을 찾아 은둔(隱遁=세상을 피하여 숨다)하셨는데 그곳이 임피(臨陂)상북면(上北面) 향림불사(香林佛舍)였는데 오늘의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 향림으로 현재의 삼상사(三相祠) 경내이다.

고려의 충신이고 자손이 번창하여 조선조에서도 평강채씨를 선양한 명상 명신 명장이 거의 소감공의 자손이다.

 

 

 ★ 판서공파 파조(判書公派 派祖)

 

◎ 7세 충경(忠敬)은 6세 수(琇)의 장자로 조선조 초기에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 禮曹判書)를 역임하시고 치사후(致仕後) 요산요수(樂山樂水)를 벗삼아 부안상경치(扶安上京峙)아래(지금의 상소산(上蘇山)에 은거(隱居) 하셨다. 이조 태종14년 보안현(保安縣)과 부안현(扶安縣)을 통합할 당시 공의 기지(基地=사시는 집터)를 관에서 동헌(東軒 =현재의 군청)터로 삼고저 둔전(屯田=관아에 딸린땅) 천묘(註: 1묘는 30평)와 공의 기지와 교환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나 공께서는 나는 많은 전지(田地)가 불필요하다 괴지(槐池=느티나무와 연못)만으로도 족하다 하시고 괴지옆으로 이거하여 정자하나를 짓고 괴정(槐亭)이라 이름하고 공의호(號)도 괴정이라 하시고 여생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셨는데 근래 자손들이 그 연못마저 지키지 못하고 국유화되었다. 공은 고려 우왕(禑王)3년 정사년(1377)에 출생하셨고 조선조 세조(世祖)9년 계미년(1463)에 졸 하시니 향년87세였고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에 장사하였다. 판서공의 재각(齋閣) 공수재(恭修齋)는 부안읍 봉덕리 95-10에 있으며 후손은 전북과 전남에 세거한다.

 

 

 ★ 목사공파 파조(牧使公派 派祖)

 

◎ 7세 지생(智生)은 6세수(琇)의 넷째아들로 조선조 태종때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고 세조원년(世祖元年)에 수충위사 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 同德左翼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 생원공파 파조(生員公派 派祖)

 

◎ 7세 충정(忠正)은 6세 수(琇)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조 초기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으로 생애(生涯)를 유유자적(悠悠自適) 하였다.